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문단 편집) === 입대 === 칼라시니코프는 이처럼 성장하면서 공학에 재능을 싹틔우기 시작했고 1936년 5년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기계 다루던 실력이 뛰어나 [[알마티]]에 위치한 [[시베리아 철도]] 기관실 기술부에 취직하였다. 이후 시베리아 철도에서 철도공으로 기관차 수리하는 일을 하는 한편, [[총덕|틈틈이 취미로 총기를 분해하고 조립하곤 했다.]] 그는 여기서 피스톤 구조를 매우 좋아했는데, 훗날 총기 설계에도 이런 피스톤 방식 즉 [[가스 작동식]] 구조에 반영했다고 한다. 그 후 상관의 추천으로 1938년 18살 나이로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신장이 162cm로 작은 편이여서 전차병으로 근무했다. 이때도 기계의 설계, 제작에 재능을 보여 전차포의 발사탄수 계측기를 개발하기도 했고, 이 공로로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손목시계를 표창으로 받았다. 이때가 20세였을 때였고 계급은 [[중사]]가 되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키예프 사단 소속 [[T-34-76|T-34]]를 몰고 전차장으로 참전, 실패로 끝난 [[브랸스크]] 반격전에서 그는 주변에 독일군 전차 위치를 보기 위해 해치 위로 몸을 내밀었는데, 독일군 전차에 포탑이 피격되면서, 어깨 견갑골에 파편이 박혔고 팔을 쓸 수 없는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러시아의 칼라시니코프 박물관을 방문하면 그의 자세한 군대 복무기록을 볼 수 있고 전차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T-34-76 1940년형(L-11주포 장착형)을 탑승하여 지휘했고, TT-30([[TT-33]]이 아니다. 초기형.) 권총을 휴대했다. 이 TT-30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전투로 탄약수 키릴은 전사, 조종수 부상, 부조종수는 운이 좋았는지 아무 부상 없이 멀쩡히 살아남았다.] 20명의 부상병과 트럭에 실려서 후방으로 후송되는 중 매복한 독일군의 습격을 받았다. 소련 경비병들은 [[모신나강]]으로 무장했으나 매복에 걸린 거라 전투는 근접전이였고, [[볼트액션]]식의 모신나강을 든 소련군들은 뛰어난 연사력과 휴대가 편한 [[MP40]]로 무장한 독일군에게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다만 굉장히 운이 없었던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독일군은 분대당 MP40을 1정 배치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하필 근접 매복만을 상정해 MP40을 몰아준 독일군을 마주친 꼴인 것이다.] 싸움에 가망이 없자 부상병을 두고 도망갔는데, 부상병들을 두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소대장은 패주하면서, 분한 마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MP40이다! [[네가 한번 만들어 봐라|누가 저런 무기 좀 만들어 주었으면...]]" 하면서 한탄했다. 이것을 들은 칼라시니코프가 AK 개발을 [[답답해서 내가 친다|결심하게 된]] 요인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남겨진 부상병들 중 칼라시니코프는 다행히도 어깨만 다친 상황이었기에 독일군들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갈 수 있었다. 살아남은 경비병들과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칼라시니코프는 요양 중 독일군의 [[MP40]]에 대응할 총기의 개발을 결심하며 총기 설계자의 길을 걷게 된다.[* AK-47의 개발 일화를 다룬 영화 '칼라시니코프'에서는 부상병들을 실은 트럭이 진흙탕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차를 빼내기 위해 후송을 통솔하던 중령과 함께 근처에 있는 마을에 말을 빌리러 갔는데 하필 국방군 병사 몇 명이 있었던 탓에 전투를 하게 된다. 이때 통솔하던 중령이 가지고 있던 [[PPSh-41]]으로 두 명을 사살한 후 헛간에 있던 한 명도 마저 사살하려던 중 급탄불량을 일으켜 장교가 총에 맞는 부상을 입게 되고, 칼라시니코프가 마지막 국방군 병사를 처치하고 난 뒤 마을에 거주하던 노인의 말을 빌려 트럭으로 돌아가던 중 장교의 PPSh-41을 살펴보며 탄창에 물이 들어가 탄과 탄창이 얼어붙어서 급탄 불량이 생기고, 스프링도 약한 데다 부품이 하나씩 분리가 되지 않는 등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총기개발을 결심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브랸스크 반격전은 1941년 10월에 끝났고, PPSh-41이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1월이어서 고증오류다. 고증대로라면 하다못해 [[데그탸료프 기관단총|PPD]]가 나왔어야 한다.] 그는 간호사에게 연필과 공책을 빌려, 총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의 총기지식은 전차병으로 복무할 당시 많은 소련제 총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무기 지식은 있었지만 총기 설계의 지식은 약간 부족했다고 시인하고 있다.[* 전차병으로 복무할 당시, 병기고에 윈체스터 1873 레버액션 소총이 1정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왜 그게 거기 있는지 신기했다고 한다. 고참병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에 부대 중사가 사냥용으로 갖고 있다가 불온 서적 소유로 굴라그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레버액션 소총은 무기 관리표에도 없이 한구석에 실탄 몇 상자와 같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칼라시니코프가 머물던 병원은 도서관을 긴급하게 야전병원으로 개조한 곳이라 기계공학 관련 기본서가 충실하게 있었고, 후방지역이라 참고할 만한 미국제 총기가 지천에 널려있었다.[* 주로 NKVD가 쓴 M1921 톰슨 말고도 [[랜드리스]]로 보급된 M4 셔먼이나 M3 리 같은 전차에는 승무원 화기로 M1928 / M1928A1 톰슨이 2정씩 세트로 공급되어서 수천 정이 공급되어 저격수나 일개 보병에게도 지급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칼라시니코프는 기존 러시아제 총기에 비해 미국 총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총기는 지리적으로 유럽에 위치해 있어 당연히 유럽계 총기 설계를 많이 따라갔는데[* [[모신나강]]과 [[나강 M1895]]는 아예 벨기에 설계자가 만들었다. 정확히는 세르게이 모신이 모신 소총을 개발하면서 벨기에 개발자 나강의 시스템을 일부 도용한 것이다. 나강이 이에 소송을 걸자 러시아 정부와 나강 본인이 1.모신 소총을 모신나강 소총으로 개명할 것 2.러시아 제국군의 제식 권총으로 나강의 개발품인 나강 M1895를 도입할 것 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모신나강 자체가 벨기에인인 나강의 설계작이라고 보기는 어폐가 있다.] [[AK-47]] 항목에 보듯 칼라시니코프의 총기는 미국색을 강하게 띄었다. 그의 최초의 총기도 [[톰슨 기관단총]]을 강하게 참조하였다. ||<-2> '''{{{+3 PPK-42}}}'''[br]'''Пистолет-Пулемёт Калашникова 42''[br]''칼라시니코프 기관단총 42'''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p-kalashnik-1.webp|width=600]]}}} || || '''종류''' ||[[기관단총]] || || '''원산지''' ||[include(틀:국기, 국명=소련)] || ||<-2> {{{#!folding 【펼치기 · 접기】 ||<-2> {{{#White '''이력'''}}} || || '''개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 || '''개발년도''' ||[[1942년]] || || '''생산 수''' ||프로토타입 2정 || ||<-2> {{{#white '''제원'''}}} || || '''구경''' ||7.62 mm || || '''탄약''' ||[[7.62 mm#7.62×25mm 토카레프|7.62×25mm]] || || '''급탄''' ||30발들이 박스 탄창 || || '''작동 방식''' ||[[클로즈드 볼트]][br][[노리쇠#단순 블로우백|단순 블로우백]](1번째 프로토타입)[br][[노리쇠#지연 블로우백|지연 블로우백]](2번째 프로토타입)[* 노리쇠 움직이는 방식이 굉장히 특이한데, '''공이를 포함한 노리쇠 전체가 회전하며 앞뒤로 움직인다.''' 블로우백이므로 회전 노리쇠처럼 이것으로 약실 밀폐라던가 그런 기능은 아니고, 노리쇠뭉치 움직임을 잡아주는 부분이 나사처럼 비틀려 있는 구조에 가깝다. 이를 통해 노리쇠 후퇴가 지연되는 것으로 보인다.][br]공이 직동식 || || '''중량''' ||2.9 kg (탄창 없이) / 3.2 kg (탄창 결합시) || || '''전장''' ||750 mm(개머리판 폈을 때) / 535 mm(개머리판 접었을 때) || || '''총열 길이''' ||250 mm || || '''조준 반경''' ||? mm || || '''발사 속도''' ||824 RPM || || '''탄속''' ||? m/s || || '''유효사거리''' ||500 m || || '''최대사거리''' ||? m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fWmGYG9x5A)]}}} || || [[칼라시니코프]] 사의 PPK-42 소개 영상 || 설계를 끝낸 칼라시니코프는 1942년 4월 퇴원하게 되었다. 마침 상부에서 집에서 대기하면서 휴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총을 완성시키기 위해 '''[[탈영]]'''해서 원래 자신이 근무하던 [[알마티]]의 시베리아 철도 기술부로 갔다.[* 칼라시니코프의 고향 알타이는 위에 서술되어 있듯 완전 깡촌이라 총을 완성할 기계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온갖 고생 끝에 1942년 중순에 그의 첫 총기인 PPK-42 기관단총을 완성하여 [[PPSh-41]]의 후속 기관단총 사업에 제출했다. 하지만 결함이 많은 데다, 생산성, 내구성 등 많은 면에서 소련군을 만족시킨 수다예프의 [[PPS-43#PPS-42|PPS-42]]가 채용되면서 그의 첫 작은 꿈은 좌절되었다. 당시 시모노프,[* [[AVS-36]] 및 [[PTRS-41]], [[SKS]]의 개발자] 수다예프[* 이후 [[AS-44]]를 제작하였으나, 사망하면서 프로토타입으로 끝났다.] 등은 그의 총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기 설계의 재능을 인정한 표도르 [[토카레프]]의 천거로 러시아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으며, [[툴라 조병창]]으로 배치되어 총기 개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나이 23세의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